REVIEW
영화를 읽다
[기고] 돌파하는 여성의 카메라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전한솔 /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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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 GO 퍼플레이 배꽃나래|2019|다큐멘터리|한국|38분 |
다큐멘터리 작업에 있어(비단 다큐 작업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촬영의 윤리에 대해 공공연히 고민하게 된 것은 시대의 영화인들이 이뤄낸 성취다. ‘촬영의 윤리’라고만 말한다면 여러가지 측면이 포함될 수 있겠다. 먼저, 촬영할 대상을 영화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두 번째로 촬영 과정에서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갔는가. 더 나아가자면 ‘카메라’라는 영상기록 도구가 가진 공공성 혹은 폭력성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라는 매우 넓고 심오한 문제로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주장이나 사견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이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경향성이 있진 않은지 고민해보게 된다. 윤리적 이슈에 예민하고 발 빠르게 움직여온 여성 감독들은 이중의 난관을 맞닥뜨린 듯하다. 하나는, 작업을 하며 ‘내가 촬영의 윤리를 충분히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의 약자성을 인식하며 작업해 나가는 여성 창작자에게 이 과정은 큰 모티베이션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검열을 반복하게 하는 고민거리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작업물이 지나치게 사적인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스틸컷
촬영자의 위치에 대해 보다 생각하고, 작품 속 인물의 대상화에 대해 보다 고민해야 한다는 성토가 이어지며 그에 집중해온 여성 창작자들의 다큐멘터리 작품은 응당 받아야 할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종종 별다른 고민 없이 평가가 붙곤 했다. ‘미시적 접근’,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사적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들이다. ‘개인 차원에서 공적 차원으로의 전환’ 같은 말은 이따금씩 기계적으로 들릴 정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 창작자들이 이중고를 겪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내 이야기는 매우 사적인 이야기인데, 사적인 인물과의 거리 설정에 실패했다면? 혹은, 내가 대상화의 윤리를 지나치게 고민하느라 나의 작품이 매우 사적인 이야기로만 머무른다면? 심증뿐인 비약일 수 있겠으나, 종종 영화 상영 후 이어지는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여성 감독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작업 내내 이와 비슷한 자기검열과 끊임없이 싸우는 경우가 없지 않아 보인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스틸컷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배꽃나래, 2019)은 4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야기를 거침없이 진행시킨다. 이 영화는 감독이 본인의 할머니가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한글 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감독은 홍콩에 가서 광둥어를 전혀 읽을 수 없어 답답하던 순간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로만 전해서는 이 영화가 가진 질주의 맛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안치연 할머니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적이고 사실적이다. 나름의 조명과 세팅을 준비한 듯한 인터뷰 컷은 할머니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과 함께 금세 사라져버린다. 이어 영화는 이런 장면들을 담아낸다. 할머니는 한글 읽기에 조바심내지 말라는 며느리의 위로에 울먹이고, 창피한 모습을 왜 찍냐며 감독인 손주에게 성을 내고, 자신이 그린 강아지 그림을 연필로 벅벅 그어 가려버린다. 한글을 몰랐을 때의 설움과 한글을 알고 난 뒤의 감동이 담겨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 대신 4년간 한글을 공부해도 원하는 대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 짜증을 내는 안치연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얼마간 당황했다. ‘이런 모습이 다 나와도 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엉망으로 선을 그어버린 강아지 그림을 다시 한 번 클로즈업 해서 아무렇지 않게 비추는 카메라에 있었다. 감독이 할머니의 행동에 대해 그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고 그림을 화면 가득 담으며 “근데 진동이(강아지) 좀 닮았는데?”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순간, 할머니는 자신이 선을 벅벅 그어버렸다는 사실도 잊은 듯 감독의 말에 응한다. 관객들은 자신의 그림을 멋쩍어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곱씹는 대신 화면에 가득 찬 그림에서 진동이의 얼굴을 찾아낸다.
감독은 할머니의 웃긴 모습들을 가감없이 찍고, 할머니의 핀잔에는 뻔뻔히 응수한다. 영화 내내 목소리로 등장하며 본인은 카메라 뒤에 위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기록엔 죄책감도 사명감도 딱히 없어보인다. 다만 할머니가 창피하다며 가리려고 하는 부분은 내버려두고, 진심으로 가리고 싶지는 않았던 이야기를 드러낸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스틸컷
‘홈 비디오’의 차원에서 카메라가 동네로 나가면서 영화는 새로운 지점에 도달한다. 그 지점은 한글학교의 여성 노인들이 대부분 하나씩 갖고 있는, 감독의 할머니는 ‘기릉지’라고 칭하지만 정식 명칭조차 찾을 수 없는, 어떤 ‘까만 점’이다. 친구와의 우정을 다짐하며 실에 먹물을 묻혀 얕게 살을 떠 만든 문신과 같은 까만 점이 그들의 팔 곳곳에 남아있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몸에 새겨진 이 점을 부르는 이름은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글을 알지 못하는 여성들이 만들어낸 ‘구술의 세계’의 또 다른 차원으로 보인다. 이름 없이 직접적인 행위가 발생할 때만 존재하고, 기록 대신 구술로만 남아 누구는 알고 누구는 알지 못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몸에 기록된 점.
이 지점에서 영화는 할머니가 우리가 아는 세계(한글)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멈추고 우리는 모르고 할머니가 아는 세계로 쏙 들어가 버린다. 성경의 글씨와 영화의 자막 대신, 할머니는 알고 우리는 모르는 기록들. 별스럽지 않다고 이름도 붙이지 않은 것들. 그리고 사실은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는 것들. 그들은 알리고 싶어도 알리지 못했던 것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스틸컷
안치연 할머니는 글자를 배우는 자신의 모습이 남사스러울지언정, 이러한 점을, 기록을, 말의 세계를 숨길 마음이 없다. “글자를 알았다면 영화라도 한 편 찍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음을 알아서인지, 감독은 할머니가 아무리 핀잔을 줘도 정면으로 그의 모습을 기록한다. 그리고 영화는 할머니의 손에 카메라를 쥐어주며 끝을 맺는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린 화면일지라도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다. 화면이 흐리고 수평이 맞지 않아도 그가 찍는 것은 산이고, 화분이고, 꽃이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다. 카메라라는 도구는 새로운 위치를 가진다. 누군가에게 지배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대신 ‘글자의 세계’가 아닌 ‘말의 세계’를 담아내기에 적합하고, 할머니가 보는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매체일 뿐이다. 안치연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아무렇지 않게 찾아내는 그림 속 진동이의 얼굴처럼.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스틸컷
감독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영화로 만들어 낸 효녀인가, 혹은 창피한 모습을 담아낸 불효녀인가? 영화는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낸 것인가, 혹은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 것인가?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은 그런 프레임에 쉽게 갇히지 않는다.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하면 정면으로 돌파한다.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들고 할머니의 세계로 들어간다. 윤리적이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게,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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