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나뉘어지지 않는 사랑을 향해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장영선|영화감독 / 2020-06-25


<더 듀크 오브 버건디>
피터 스트릭랜드|2015|드라마, 멜로/로맨스|영국|104분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스틸컷

영화가 시작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숲 속에 홀로 앉아있는 에블린(키아라 드안나)의 뒷모습이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나뭇잎 사이로 해가 비추는 모습을 올려다보던 그는 곧 자전거를 타고 신시아(시드세 바벳 크누드센)의 집으로 간다. 신시아는 에블린의 고용주이자 거대한 성 같은 집의 주인이며 곤충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일을 하러 온 에블린에게 문을 곧장 열어주지 않고 문 앞에 선 채 한동안 기다리게 만든다. 차가운 얼굴로 문을 열고 늦었다고 면박을 주며, 잠시 소파에 앉은 에블린에게 앉지 말고 곧바로 일을 시작하라고 한다. 일할 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고, 엎드려 바닥을 닦고 있는 에블린을 향해 방금 까먹은 사탕 껍질을 던진다. 

신시아는 악독하고 거만한 고용주처럼 보인다. 그는 집안일을 끝낸 에블린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퇴근하지 못하게 하고는 방으로 불러들여 발마사지를 시킨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에블린에게 가지 말라고 명령한다. 여전히 악독하고 거만한 태도의 연장이지만 그 둘 사이에는 에로틱한 분위기가 감돈다. 신시아는 일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 에블린을 애타는 눈빛으로 훔쳐본다. 신시아의 집에 전시되어 있는, 아마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 중인 나비들의 표본을 보며 우리는 쉽게 나비가 ‘변태’ 과정을 거치는 곤충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실로 에로틱한 사디즘-마조히즘 무비의 전형 같은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스틸컷

그러나 이러한 도입부가 지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조금씩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단순히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인 줄 알았던 신시아와 에블린이 사실 연인 관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에블린은 신시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레이션으로 드러낸다. ‘당신의 것일 때만 나는 살아있어요.’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내가 살아있으려면 나는 당신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당신에게 속해서 당신의 안에서 움직이고, 당신의 소유로서 다뤄져야만 ‘나’라는 존재는 온전하게 ‘당신의 것’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눈치 챈다. 이 모든 관계의 리더는 에블린이라는 것을. 

신시아가 에블린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 카드에 적혀져 있는 정해진 대사들이다. 에블린이 도착하면 문을 바로 열어주지 말고 기다리게 해야 한다는 상세한 디렉션까지 적혀진 카드를 보며 신시아는 에블린에게 미리 정해져 있는 모욕을 가한다. 반복되는 일상과 반복되는 모욕 사이에서 사랑은 계속된다. 그러한 상성이 딱 맞는 두 사람이었으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신시아는 이 역할극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에블린에게 너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너와 함께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주류’들이 행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그러나 에블린은 그 순간도, 그 언어들도 참지 못한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길 요구한다. “너는 나의 하녀이고, 착한 하녀가 되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묶어두고 의자로 쓸 거라는 말을 들으며 그녀는 사랑을 느낀다. ‘비주류’의 방식이다.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스틸컷 

퀴어의 한국어 사전적 의미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적 소수자들을 통틀어 이르는 명사이다. 이는 ‘기묘한, 이상한’으로 풀이되는 영어단어 ‘queer’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묘하고 이상한, 비슷하고 평범한 주류와는 다른 비주류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퀴어영화’라는 말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적 소수자들이 등장하거나 그를 소재, 혹은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을 뜻할 것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퀴어들은 영화 속에서 주변적이고 버림받은 존재였거나, 부도덕한 존재로 재현되거나, 혹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소극적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 이후가 되어서야 그들이 주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 존재하며 그들의 사랑이 사랑 그 자체로 묘사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그렇게 해서 퀴어영화는 퀴어영화가 되어 퀴어들의 여러 가지 인권 문제를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성애자들로 하여금 제대로 알게 하였다, 로 끝날 수 있었다면 아주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퀴어영화 내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성 퀴어와 여성 퀴어, 동성애자와 더 하위 성적 소수자들, 더 나아가 백인 퀴어 대 유색인종 퀴어. 전자들은 퀴어영화의 주류로서 그들 중심의 퀴어영화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고, 그 사실은 곧 비주류들이 이른바 ‘퀴어의 퀴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퀴어영화는 비주류를 대변하는 영화의 장르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나뉘어진다면, 과연 퀴어영화라는 장르는 어떻게 발전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수많은 퀴어영화 제작자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스틸컷

<더 듀크 오브 버건디>는 그러한 고민에 나름의 방식으로 화답하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우선 이 영화에는 단 한 명의 남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발표회장을 꽉 메운 수많은 곤충학자들은 모두 여성이다. 결코 현실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설정이다. 그뿐 아니라, 이 커플이 행하고 있는 사디즘-마조히즘적인 역할극이 이 영화 속에서는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인간 변기’ 등을 제작해서 파는 사업자가 있으며, 그 사업자는 앞서 밀린 주문량 때문에 아주 바쁜 상태이다. 마치 이 영화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런 장비들을 집마다 하나씩 갖춘 채로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설정 전체가 ‘퀴어’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내에서의 주류는 에블린이다. 걸핏하면 자신을 가둬달라고 부탁하며, 망설이는 상대방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면 좋겠다”고 비아냥대는 에블린의 요구는 그가 주류인 이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이나, 비주류인 신시아가 감당하기엔 때때로 무리다. 

그렇다 해도 신시아는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다. 에블린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러나 에블린은 비주류인 신시아의 부족한 면을 다른 이에게서 채우려 한다. 그리고 이것을 신시아는 손쉽게 눈치 챈다.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신시아와 에블린이 끝없는 욕망을 불태우다가 파멸하는 것을 영화의 결말로 예측하는 것은 우리가 주류적인 영화들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두 사람은 그저 기존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며 기존의 방식으로 사랑을 계속 이행한다. 그러나 정해진 대사를 하고 역할극을 완수하는 그 방식에 신시아가 더 이상 몰입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을 때, 에블린은 신시아를 위해 자신의 방식을 바꾸기로 한다. 대사를 적은 카드를 불태우고, 대신 신시아와 함께 피크닉을 가서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을 속삭인다.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스틸컷

<더 듀크 오브 버건디>는 퀴어영화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캐릭터와 그들 사이의 서사 이외에 존재하는 영화적 체험의 순간이나, 정밀하게 엮인 사운드에서 오는 감각적 경험은 단연 퀴어하다고 할 만 하다. 퀴어영화의 역할이 비주류가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그들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더 ‘퀴어’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 역할을 다 하는 방법일 것이다. 여성 퀴어, 하위 소수자, 유색인종 퀴어들의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지고, 그들의 캐릭터가 더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모습이 더 많이 묘사되는 것이, 그리고 영화의 제작 방식 또한 퀴어해지는 것이 퀴어영화의 역할을 다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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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정하게 바삭바삭>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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