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파괴자로서의 ‘여성’: ‘여자다운’이 아닌 이토록 ‘인간적인’

<디스트로이어>

홍재희|영화감독 / 2020-06-04


<디스트로이어>
캐린 쿠사마|2018|범죄/스릴러|미국|121분|15세이상관람가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걸파이트>(2000), <이온 플럭스>(2005) 등과 같은 다양한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드라마, 액션, 코미디, 호러 등 다양한 장르 실험을 했던 캐린 쿠사마 감독의 <디스트로이어>(2018)는 니콜 키드먼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으로 화제가 됐던 영화다.

범죄조직 잠입 수사 중 동료이자 연인을 잃은 경찰 에린(니콜 키드먼). 17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 보라색 잉크가 묻은 100달러짜리 지폐가 배송된다. 17년 전 상흔이 남긴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에린에게 배달된 지폐는 기억 속에 봉인한 트라우마를 터트리는 도화선이 된다. 지폐가 은행털이에 가담했던 조직의 보스였던 사일러스에게서 온 것임을 직감한 에린은 죽은 애인의 복수를 위해 사일러스를 쫓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보면 범죄 장르 영화의 전형적 서사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이야기 구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누군가를 향해 장전된 총을 겨누고 있는 니콜 키드먼의 이미지와 ‘17년의 기다림, 그녀의 복수가 시작된다’는 자극적인 표제만 보고 <테이큰>, <아저씨>, <올드보이>처럼 통쾌한 액션이나 교묘한 두뇌게임에 기막힌 반전을 기대했다가는 대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저런, 포스터에 낚이셨습니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경찰, 형사 또는 특수 요원이 주인공인 대다수 복수극 서사 영화와 <디스트로이어>의 공통점은 딱 하나다. 복수극이라는 것. 그 외는 없다. 총구가 미친 듯이 불을 뿜는 무자비한 복수극과는 아예 출발점부터 다르다. 일반적인 범죄 형사물이 빠른 템포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현란한 액션으로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면 이 영화는 정반대로 간다. 전율보다는 서사에 방점을 찍고 회한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간다. 

캐린 쿠사마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서 단순히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을 넘어 내러티브 자체를 꼬아버린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와 꼬리를 물어버린 평행 우주 같은 엔딩. 마치 이 한 장면을 위해 영화의 처음과 끝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데 시간을 꼬아버린 복잡한 서사는 진실을 폭로한 쾌감을 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에린의 과거와 현재 두 갈래 이야기로 진실을 쫓지만 무엇이 과거이고 현재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락거리를 기대한 관객에게 <디스트로이어>는 불친절하고 불편한 영화일수도 있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범죄 장르의 주인공 대부분이 복수 하나를 위해 직진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거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영웅 또는 악의 무리를 소탕, 응징하는 정의구현 캐릭터라면 <디스트로이어>의 주인공 에린은 이도 저도 아니다. 에린은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명 ‘루저’다. 술이 덜 깨서, 잠을 못 자서 대낮에도 비틀거리는 경찰 에린은 어디서나 얻어맞고 다칠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그가 복수를 위해 나선 길은 뻥뻥 뚫린 잘 닦인 고속도로가 아니라 여기저기 깨진 아스팔트다. 위태위태한 불안감으로 가득한 에린의 모습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인썸니아>(2002)의 주인공 경찰 윌 도머(알 파치노)와 어딘가 닮았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형사. 하지만 원인 없는 불면의 밤은 없다. 에린과 월은 똑같이 죄의식과 진실의 무게 때문에 잠 못 드는 형사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디스트로이어>는 바로 죄의식에 대한 영화다. 

에린은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인물이다. 말 못 할 비밀이 있으며 감춰야 할 진실이 있다. 에린은 사건의 진실을 고백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딸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에린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상처는 17년 동안 응어리진 회한과 자책, 고통의 결정체다. 상처는 아물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잠복근무 중에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로, 욕심을 부린 탓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야하는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바로 시간이 아닌가. 어떤 죗값을 치루더라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사실 죄책감으로 회한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기억 속에서 오늘도 현재진행이다. 그에게는 과거와 현재라는 경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삶의 목적을 상실한 에린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딸 셸비(제이드 페티존)의 존재다. 에린은 막장 경찰이지만 셸비에게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애처로운 엄마다. 미성년자인 딸이 학교를 빼먹고 성인 남자를 만나며 술집을 드나드는 걸 목격한 에린은 모른 체 할 수 없다. 하지만 둘 사이에 쌓여버린 앙금이 너무 깊어서 대화는 겉돌고 자꾸 빗나간다. 셸비는 툭하면 경찰 배지를 내보이며 자신을 통제하려드는 알코올 중독자 엄마를 경멸한다. 술로, 망각으로 도피하려 했던 에린을 엄마로서나 인간으로서 이해하기에 셸비는 너무 어렸다. 엄마에게 소외당한 상처와 미움이 더 컸던 탓이다.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 딸을 방임한 무책임한 엄마였지만 에린은 딸이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딸을 키울 여력조차 없어 남에게 딸을 의탁했지만 딸을 향한 마음은 진실이었다. 이 세상의 죄 많은 부모는 언제나 자식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법이다. 에린은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나기 전 셸비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긴다. ‘딸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말렴’.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 영화에서 여성은 언제나 피해를 당하는 희생자이거나 기다리는 보조자였다. 영화 <테이큰>에서처럼 여성은 남성(아버지)이 구조해주길 기다리는 존재(딸)이거나 현장으로 목숨 걸고 떠나는 남성(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가족, 애인 또는 배우자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말 그대로 ‘디스트로이어’, 남성을 파멸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파괴자’ 즉 팜므 파탈로 등장한다. 

고전에서부터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범죄 스릴러 액션물에서 여성은 대개 희생자 또는 보조자 혹은 남성을 유혹하는 사악한 미녀(마녀)로 등장한다. 여자는 둘 중 하나다. 착한 여자 아니면 나쁜 여자. 남성만이 인간의 표준이자 기준이 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가르는 성차별적인 이분법은 장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달콤한 인생>(김지운, 2005)이나 < L.A. 컨피덴셜 >(커티스 핸슨, 1997)등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영화는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 남성 형사는 사건의 의뢰자 또는 피의자, 용의자이거나 보스의 아름다운 정부에게 빠져들어 일을 그르치고 신세를 망친다. 

그러나 캐린 쿠사마 감독은 ‘파괴자’로서의 여성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주인공 에린은 제목 그대로 디스트로이어, 파괴자다. 그러나 에린은 ‘팜므 파탈’이 아니다. ‘파괴자’이지만 남성을 위험에 빠트리는 유혹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에린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만 딸과 동료를 보호한다. 단독 행동을 하는 이유를 캐묻는 남자 동료에게 에린은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사적인 일이다’라며 동료의 개입을 전면 차단한다. 에린은 피해자나 보조자가 아니라 스스로 복수를 감행하는 능동적 ‘집행자’이자 ‘단독자’인 것이다. 에린은 우리가 기존 영화에서 늘 봐왔던 수동적인 여성 역할을 거부한다. 그는 남성이 자신을 구해주기를 기다리거나 남성의 품에서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다. 에린은 어떤 남성의 도움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일을 수행한다. 에린은 범죄의 응징과 처단에 나선 영웅임과 동시에 범죄에 가담한 문제적 주인공이자 반 영웅이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성은 인간의 ‘표준’이자 ‘일반’이다. 남성은 그 자체로 인간이지만 여성은 그저 ‘여자’다. 남성이 인간의 기준이 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이 개인이며 인간임을 증명하는 데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남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성 주인공은 그가 어떤 인물이며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다. 그의 감정과 행동은 당연하게 ‘인간적’이라고 간주된다. 반면 여성 주인공은 인간 일반이기 전에 ‘여자’라는 단서가 붙는다. 여성은 한 사람의 개인이기보다 ‘여성’으로 먼저 인식된다. 남성은 그 자체로 ‘보편’이지만 여성은 ‘특수’다. 여성은 그냥 경찰이 아니라 ‘여’경찰이며 ‘여’형사다. 일터에서조차 여성은 언제나 ‘여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한 개인으로 인정받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로서만 평가받는 사회에서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답지 않다’거나 ‘남자같다’라는 비난에 직면한다. 만일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디스트로이어>의 에린이라는 인물은 매우 낯설고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에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식을 방치한 엄마, 침묵으로 일관하는 고독한 형사,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경찰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지금까지 숱한 영화 속에서 부모로서 그리고 경찰로서 실패한 내리막 인생을 살고 있는 에린 같은 캐릭터는 아버지, 즉 남성 주인공의 전유물이었다.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하거나 버림받거나 이혼당한 경찰, 알코올 중독에 빠진 고독한 형사, 타인과 소통 능력을 상실한 일 중독자. 인간적인 고독과 고뇌는 마치 ‘남성’의 상징이라는 듯 이 모든 남성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불면에 시달리거나 창밖을 내다보며 쓸쓸히 담배를 피우고 홀로 술잔을 들고 취해있었다. 

그런데 캐린 쿠사마 감독은 <디스트로이어>에서 그동안 줄곧 남성이 독점하던 우울하고 고독한 반사회적인 캐릭터를 여성인 에린으로 바꿔 놓는다. 사람은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며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어느 여성도 착하거나 나쁘기만 할 수 없다. 감독은 여성 주인공에게서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과감히 떼어 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한 ‘개인’을 등장시킨다. 

<디스트로이어> 스틸컷

50대 여성 에린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 좋은 ‘엄마’도 아니며 원숙한 매력의 ‘중년 여성’도 넉살 좋고 인심 후한 ‘아줌마’도 아니다. 에린은 거친 외모에 피폐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찰’일 뿐이다. 위장 경찰이라는 본분을 까먹고 한 몫 챙길 꼼수를 쓰는 속물적인 인간이면서 제 욕심 때문에 모든 걸 잃은 가여운 인간이기도 하다. ‘파괴자’ 에린. 경찰이라는 직업적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며 죄의식과 복수심에 사로잡힌 인물. 영화를 보는 내내 여자나 엄마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에린의 고독이 더 크게 다가왔다. 만고풍상을 겪고 상처받은 외로운 어느 인간의 초상. 에린은 복합적이고 복잡한 내면을 지닌 문제적 인간이었으며, 그저 한 ‘사람’이었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성별, 즉 젠더(Gender)는 결정된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다. 성별 젠더라는 것도 믿음과 신념 체계일 뿐이다. 진정한 젠더 평등은 젠더로 규정되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젠더 자체에서 자유로워질 때 시작된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비로소 한 사람으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한쪽 성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영화에서 더 많은 에린(들)을 보고 싶다. 여성/남성 또는 여자다움/남자다움이라는 꼬리표를 뗀 인물, 젠더 이분법을 넘어선 고정관념을 파괴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 여성이 다양한 캐릭터로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 여자친구, 아내, 엄마, 아줌마가 아니라 살인자, 도박꾼, 사기꾼, 고독한 형사, 부패한 경찰, 중독자 의사, 비열한 변호사, 속물 사업가, 천재 과학자인 주인공을 보고 싶다. ‘여자다운’ 캐릭터가 아니라 이토록 ‘인간적’일 수 없는 캐릭터를. 여성이 그저 개인으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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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메일> <암사자(들)> 등 연출, 『그건 혐오예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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