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어떤 알고리즘>을 넘어

<어떤 알고리즘> 제작기

민미홍|영화감독 / 2019-12-26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민미홍 감독 필모그래피
2017  <어떤 알고리즘> 연출

<어떤 알고리즘> 촬영 현장 ©민미홍 감독

1. “영화를 보는 것과 찍는 건 다르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처음 영화과에 입학했을 때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당연히 보는 것보다 찍는 게 더 힘든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찍어보니 그냥 힘든 수준이 아니었다. 극장에서 팝콘 먹고 콜라 마시며 영화를 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사실 영화를 찍어보기 전까진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특히 외국영화는 더 그랬다. 하지만 영화를 찍어보고 난 뒤엔 어떤 영화든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본다. 관객으로서 영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고생한 스태프와 배우들을 응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시나리오가 밑그림이면 채색은 배우가 한다
<어떤 알고리즘>(2017)은 배우들 모두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 없이 대본을 쓰던 주인공 지원(김윤지)이 실제 동성애자 민아(이주영)에게 접근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글을 완성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지원이 민아를 인터뷰하며 캠코더로 찍은 영상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며 진행된다.

배우들이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났다고 느낀 부분은 그 캠코더 장면을 촬영하면서였다. 캠코더 촬영 장면 중에 이런 신이 있다.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어떤 알고리즘> 촬영 현장 ©민미홍 감독

-------------------------------------------------------
S#7. 지원이 찍은 인터뷰 영상, 학교 옥상.
학교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있는 민아. 지원이 찍는 카메라 뷰 파인더로 민아가 보인다. 지원이 민아의 전 여자친구인 김윤정에 대해 묻는다.

지원(V.O)
너랑 김윤정 중에 누가 남자 역할이었어?

민아
(웃는다) 둘 다 여잔데 누가 남자 역할을 해?
-------------------------------------------------------

내가 쓴 시나리오는 여기까지였다. 나는 지원의 질문에 민아가 “찍지 말라”고 답했으면 좋겠다고 디렉팅을 했다. 몇 번의 테이크를 반복하던 중 갑자기 지원이 애드리브를 쳤다. 다음은 영화 속 배우들의 애드리브로 채워진 장면을 시나리오화 한 부분이다.

-------------------------------------------------------
지원
근데 너는 왜 머리가 짧아?

민아
(어이없게 웃으며) 왜 머리가 왜 짧냐니? 짧은 머리가 좋아서 짧은 머리 하는 거지

지원
난 니가 남자인 줄 알았지
-------------------------------------------------------

<어떤 알고리즘> 촬영 현장 ©민미홍 감독

“넌 왜 머리가 짧아?”라는 김윤지 배우의 애드리브에 당황한 이주영 배우는 당시 실제로 웃음이 터졌다. 웃기만 했으면 NG가 났을 테지만, 이주영 배우는 웃으며 애드리브를 받아쳤다. 이 장면은 배우들이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력 없이는 불가능한 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을 쓰면서 레즈비언 커플에게 남녀 역할이 나뉘어 있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지원이, 짧은 머리의 민아에게 할 법한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민아가 왜 짧은 머리인지 정말 궁금했던 지원과 그런 지원의 질문에 어이없이 웃는 민아가 진짜 같아 보였다.

한 번은 학교 신을 촬영하던 중이었다. 촬영 중 잠깐 쉬는 시간이 생겨 김윤지 배우에게 캠코더를 주며 이주영 배우를 찍어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캠코더를 들고 떠난 배우들이 1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도 안 오길래 배우들을 찾으러 갔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캠코더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내려와서 찍은 영상을 확인해 봤는데 정말 좋았다. 영상 속에는 배우가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지원과 민아가 있었다.

영화의 러닝 타임 상 배우들이 촬영한 캠코더 영상을 많이 사용하진 못했지만, 배우들이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꽉꽉 채워 연기해줬다고 생각한다.

<어떤 알고리즘> 촬영 현장 ©민미홍 감독

3. 겨울은 너무 춥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겨울은 너무 춥다. <어떤 알고리즘>은 2015년 12월 말에서 1월 초에 촬영한 영화다. 기록적인 한파의 날씨였다. 영화를 찍은 지 벌써 3~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추위가 생각난다.

농담이 아니라 나는 이 영화 촬영 이후로 겨울 배경의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 현재 상업영화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 겨울 촬영을 피할 수는 없지만, 내 시나리오를 쓸 때만큼은 겨울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이 영화는 학생이 주인공인 영화라 배우들이 교복을 입고 나온다. 촬영을 준비할 당시 교복 위에 패딩 점퍼나 코트를 입는 게 미관상 예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정말 교복만 입었다.

첫 촬영이 끝나고 그런 내 선택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현장에 따뜻한 물, 담요, 핫팩 등을 준비해두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는 날씨였다. 배우의 입이 얼어서 대사가 꼬이는 경우도 있었고, 입김이 너무 많이 나서 NG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찍어놓은 분량이 있어서 갑자기 옷을 입힐 수도 없었다. 추위에 고생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보면서 ‘내가 왜 한겨울에 촬영을 해서 이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지?’라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본 사람들은 ‘배우들이 별로 추워 보이지 않는다’ ‘가을에 찍었냐’고 말한다. 극장에서 팝콘과 콜라를 즐기며 영화를 보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다시금 깨닫는 말이다.


<어떤 알고리즘> 촬영 현장 ©민미홍 감독

추위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또 있다. 극 중 민아가 자신을 찾아온 지원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영화 속에서는 민아가 물을 뿌리는 장면만 있고, 지원이 맞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지원은 그 추운 날씨에 두 번이나 물벼락을 맞으며 촬영을 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카메라가 계속 꺼졌고, 하필이면 지원이 물벼락 맞는 장면의 데이터가 손실됐다. 추가 촬영할 여건이 되지 않아 영화상에는 지원이 물 맞는 장면을 넣지 못했다.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도 영화를 보면 그 장면이 없는 게 아쉽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느낀 가장 큰 점은, 내가 쓴 시나리오 한 줄에 세계가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한 줄에 영화 속 세계는 배경이 바뀌고, 사건이 바뀌고, 날씨가 바뀐다. 어떨 때는 사람의 생사도 오간다. 나는 한파의 날씨에 감독의 무게를 느꼈다.

사실 <어떤 알고리즘>은 겨울 배경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영화였다. 여러 여건상 겨울 촬영을 택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추운 날씨에 고생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미안함이 더 컸던 것 같다. 꼭 겨울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한, 앞으로도 나는 겨울 배경의 시나리오를 쓰지 않을 예정이다.

<어떤 알고리즘> 촬영 현장 ©민미홍 감독

4. 영화는 찍는 것보다 완성하는 게 더 힘들다
영화를 찍는 모든 과정이 다 쉽지 않지만, 그중 가장 힘든 게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단편영화는 더 그렇다. 과제라거나 졸업영화였다면 언제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데드라인이 있었겠지만 <어떤 알고리즘>은 그런 데드라인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완성은 점점 미뤄져 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완성되는 단편 영화들도 있다. 나는 그런 단편영화 감독들이 존경스럽다.

<어떤 알고리즘>은 2015년 12월에 촬영해 2017년 4월에 완성했다. 프리 프로덕션(촬영 준비 기간)을 포함하면 총 제작 기간이 1년 반 정도 걸린 셈이다. 웬만한 상업영화보다 오래 걸렸다. 데드라인이 없다 보니 끝없이 안일해졌다. 먹고 사는 게 바빠서, 후반 작업할 돈이 없어서, 편집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저런 핑계를 들다 보니 어느샌가 영화를 찍은 지 1년이 지나있었다. 겨우 후반 작업을 끝내고 완성본을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보여줬을 때 그들 중 누군가 그랬다. “이 영화 완성되긴 하는 거였어?” 그 말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미안했다. 모두들 고생했고, 영화가 어떻게 완성됐을지 궁금했을 것이다. 

세상일이 다 그렇긴 하겠지만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의 추진력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후반 작업까지, 감독이 추진력을 잃으면 기껏 촬영해 놓은 영화가 외장 하드에만 갇혀 있을 수도 있다. 

매번 영화를 찍으면서 조금씩 성장한다는 느낌을 가진다. <어떤 알고리즘>을 찍으면서도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 성장을 발판으로 앞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다. 요즘 새로운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막상 시나리오를 쓰는 추진력이 부족해 기획단계에만 머물러있다. 일단 추진력부터 충전한 뒤 더 좋은 영화로 다시 스크린 앞에 서고 싶다.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블로그 공유 URL 공유

PURZOOMER

<어떤 알고리즘> 연출

[email protected]


관련 영화 보기


STORY : MY FIRST

퍼플레이 서비스 이용약관
read error
개인정보 수집/이용 약관
read error

Hello, Staff.

 Newsletter

광고 및 제휴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