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윤시내가 사라졌다>
퍼플레이 / 2022-04-21
<윤시내가 사라졌다>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상영작 김진화|2021|드라마|한국|108분 |
<윤시내가 사라졌다>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엄마와 딸. 이 유구한 이야기 소재를 싫어하는 법을 모른다.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유쾌하면 유쾌한 대로 어쩔 수 없이 끌리고 만다. <윤시내가 사라졌다>(김진화, 2021)는 클리셰라면 클리셰인 모녀의 애증을 중심에 놓고 딸의 상처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엄마는 그때 왜 그랬는지 말하기 위해 달려간다. 돌려 말하지 않는 이 영화는 특유의 기세로 돌진하듯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전설의 가수 윤시내(윤시내)가 콘서트 당일 돌연 잠적하고,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로 활동하는 순이(오민애)는 자신의 우상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출발한 로드 트립에 조회수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유튜버 딸 하다(이주영)가 은근슬쩍 합류한다. 남들의 관심을 먹고 살지만 정작 서로에게는 관심이 없는 하다와 순이는 차 안에서도 서먹하다. 남보다 못한 데면데면함은 관계의 망가짐 정도를 가늠하게 하고, 얼렁뚱땅 펼쳐진 여행에 초대된 관객은 불안하면서도 궁금하다. 둘이 과연 화해할 수 있을까?
유일하게 윤시내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1세대 이미테이션 가수에게 윤시내의 행방을 묻기 위해 순이는 다양한 ‘시내’들을 찾아간다. 순탄할 리 없는 그 여정은 말 그대로 우당탕퉁탕 흘러간다. 그러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줄 모르는 모녀 사이에 흐르던 불편한 기류가 이내 폭발해버리고 만다. 하다가 지금의 상황을 라이브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순이는 숨겨진 카메라를 발견하고선 차를 박차고 내린다. 서로에게 날 선 말들을 내뱉던 엄마와 딸은 결국 그 자리에서 갈라선다. “남들한테 우스워지고 싶으면 너 혼자서 해.” “이미테이션 주제에 고고한 척은.” “어쩐지 안 하던 짓 한다고 했어. 네가 무슨 내 걱정을 하겠어.”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걱정하는 사이였어?”
<윤시내가 사라졌다>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윤시내 바라기’로 사는 엄마를 하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순이에게 딸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대개 그렇듯 둘의 문제도 ‘대화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나는 1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게 될 수도, 초라한 자신을 딸에게 들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윤시내로 인해 생긴 길고도 깊은 오해는 결국 “윤시내 어드벤처”의 막바지에 다다라 끝을 맺는다.
하다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부른, 순이가 마치 한을 쏟아내듯 열창한 노래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는 신명 나면서도 애달프다. 한줌의 미련을 움켜쥐고 / 우러러 그리움은 맺혀있고 / 희미하게 멀어질 사연이건만 / 때때로 폭풍처럼 뜨겁게 휘져가네 / 벗어나고 싶어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 / 지쳐버린 내영혼 조금씩이라도 / 벗어나고파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 “고작 나처럼 될까 봐” 딸의 재롱도 예쁘게 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순이와 그런 엄마를 보며 혼자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하다는 분명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이야기의 시작이 된 그 윤시내가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 전해주는 말들에는 오랜 세월을 버텨낸 이의 힘이 깃들어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은 것이라는, 이제 나도 내 세상을 가져보고 싶다는 말은 희망차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프다. 수많은 ‘가짜’를 만들어낸 ‘진짜’ 또한 자신의 세상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간 것이었다면 그 ‘진짜’를 우러러보며 살아온 ‘가짜’들의 삶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윤시내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대답은 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순이가 방문했던 ‘이미테이션 가수’ 학원에 걸려 있던 그 문장. 가짜에도 진실함이 있다. “그딴 짝퉁”이라고 해서 그들이 살아온 삶이 모두 가짜인 것은 아닐 테다. 서로를 제대로 마주한 순이와 하다가 해묵은 갈등에서 이제는 벗어나 모녀 관계의 제2막을 열어나가길.
PURZOOMER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여성 그리고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냅니다.
REVIEW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퀴어픽션영화 혹은 퀴어실험영화 만들기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이상한 영화나라, 20년 차 토끼굴 탐험가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너도 만들 수 있어 애니메이션!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욕망과 절망의 망망대해에서 가망이라는 부표 찾기
[퍼플레이 밋업데이] 수낫수: 여성퀴어 콘텐츠 제작기
[퍼플레이 레벨업데이] 이지민: 연출자를 위한 촬영 강의
[퍼플레이 밋업데이] 이영음: 영화부터 뮤비까지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우당탕탕 첫 장편 만들기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할머니와 카메라와 나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쓰고 만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