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에세이

나의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벡델데이2021 벡델 에세이 공모전 선정작

김이상희 / 2021-09-17


2회째를 맞이한 벡델데이 2021은 올해 슬로건인 BE NEXT!를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단편영화 공모와 글, 사진, 만화 등 자유 형식의 에세이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길지 않은 공모 기간 동안 약 70여 편의 작품과 다양한 주제와 내용의 글이 접수됐음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대체로 여성 화자의 글들이 많긴 했지만, 다행히도 세대별로 남성 화자의 글들도 도착해 이번 공모전은 성별 간, 세대 간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에세이에 담긴 내용들은 나다움, 소수자에 대한 혐오, 페미니즘,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성별 고정관념, 전통적 성 역할에서 오는 편견들 대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심사를 맡게 된 저희들은 글이 가진 완성도 자체를 평가하기보다는 지금 바로, 우리 사회에 당면한 불평등 문제를 작가 고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점과 심사위원들의 다수의 공감대 형성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끝으로 올해 벡델데이 2021에서 첫 시도된 벡델 에세이 공모전에 지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불어 심사위원들은 우리끼리만 보고 말기에 아까운 글들이 많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됐으면 하는 바람 또한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성평등한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일동
(배종대, 윤단비, 이태겸, 임선애 감독)

우산을 펼쳐들었다 다시 접었다.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요즘이다.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벌써 오늘은 6월 30일, 한 해의 절반이 지났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7월 하루 전날이다. 험난한 더위를 예고하기라도 하듯 비가 먼저 각양각색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일주일 일기예보를 보니 장마인 걸 알았고, 그래서 요즘은 가방에 항시 우산(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 굿즈 우양산!)을 갖고 다닌다. 다행히 집에서 나올 때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나오고, 집에 돌아갈 때도 멎으면 돌아가서 쓸 일은 거의 없다(왜냐면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집에서 카페까지, 왕복 두 시간 정도를 오가므로). 비가 뜸들이듯, 간 보듯 오는 게 좀 짜증나긴 한다. 그러나 장마, 떠올려보면 마냥 좋지 않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장마를 기다렸다. 헐벗은 장승처럼. 

학교 다닐 적 나는 체육 시간이 매우 싫었다. 특히 구기 종목은 배드민턴을 제외하곤 끔찍하게 여겼다. 첫 번째, 아주 못한다. 두 번째, 못해서 반 아이들에게 욕을 먹는다. 세 번째, 그러니 좋아할 리도 없고 운동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 농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축구는 정말 나랑 지지고 볶은 세월이 꽤 된, 오랜 원수이자 친구인 ‘그 무엇’이다.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잘 하지도 못하니 그만큼 고역인 게 없었다. 항상 마지막 나머지 떨이세트로 진 팀에 수비수로 팔려갔다. 그 마저도 열심히 한답시고 눈으로 공을 따라 좇지만 우물쭈물 하는 사이(얼굴에 공이 맞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 공에 대한 공포도 한몫했다) 골대가 뒤흔들린다. 

아이들은 그거 하나 못 막느냐면서, 못하더라도 열심히 좀 하라면서 욕설 섞인 비난을 마구 해댄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축구에 강제 징집(!)되고-여자는 꼭 피구를 시키고. 아마 다들 공감할 것이다... 국룰 아닌가, 체육 선생님들의-수행평가를 보고, 놀 때도 따돌림 당하지 않거나 혼자 있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해야 했다. 농구도 같은 맥락이었다. 발보다는 손이 쉬워 그나마 아주 조금, 즐겼지만 말이다. 

왜 남자는 축구만, 여자는 피구만 해야 하는지, 남자애가 피구를 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여자애 같다고 놀림을 받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정해놓은 원칙인지. 나는 축구를 하면서 끊임없이 남성적 정상성, 남성성에 대한 자기확인과 자기혐오와 맞닥뜨려야 했고, 그때마다 좌절하고 절망했다. 

왜 나는 남자로(정확히 말하자면 비퀴어 남성) 태어났는데 축구를 못하나? 본디 ‘정상적인’ 남자애들은 축구를 다 좋아하고 잘하기 마련인데. 설사 보는 것이라도. 

또 체육시간에 화장실이나 교실에서 다 같이 옷을 갈아입는 것도 불만이었다. 동성애자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당황스럽고 곤혹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과도하고 예민하게 반 남자아이들의 ‘몸’에 반응했으며, ‘같은 남자끼린데 뭐 어때’라는 식의 지극히 비퀴어 이성애자 남성중심적 사고는 나로 하여금 내적 반발과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래서 나는 비가 오기를 늘 빌었다.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면 기상캐스터 꿈나무 마냥 내일 날씨를 시간대별로 체크하고(시간대별 체크는 정말 중요했다. 아침에 오다가 오후에 안오면 그거야말로 말짱도루묵인 일도 없었다), 일부러 꾀병 핑계로 학교를 빠지거나 조퇴했으며 아프다는 이유로 관람만 하거나 보건실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한국 사회가 그어놓은 ‘정상적인 남성’의 틀에서 벗어난 존재였으며, 부모님을 제외하곤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 반 아이들, 어느 누구도 이해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장마는 그래서 내게 반가운 존재였다. 비가 오는 동안엔 적어도, 운동장에서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강당이 있으면 Fail이지만(농구나 미니 축구 등 실내에서도 가능한 경기들! 으으)

덥다. 카페 안이다. 습하고 더운 느낌이 에어컨 때문에 어느 정도 가셨다. 아토피로 홧홧한 피부도 진정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축구 규칙을 잘 모른다. 그래서 볼 줄도 모른다. 이따금 한일전이 있을 때나 가족과 함께 보는 정도다. 축구를 보러 간 적도 내 기억으론 딱 한 번뿐이다. 농구는 물론이고 야구 등 그 외의 운동경기도 직접 관람한 적도, 중계를 보거나 즐긴 적도 전무하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하다. 여타 다수로 인식되곤 하는, 축구 등을 즐기는 남성들과 달라도. 아직도 학교 체육시간은 두렵다. 오죽하면 누나가 대학교나 군대 가서 어떡하려고 그러느냐고 타박을 줄 정도였을까. 체육시간은 내게 극복의 대상도 아니었고, 아니다. 그냥 싫으면 싫은 거다. 안하면 되는 거고, 그건 자유이다. 근데 내겐 그런 자유와 권리가 없었고(정확히 말하면 학생으로서 인권을 빼앗겼고) 그래서 장마를 기다렸다. 장마는 학창시절 나를 보호해주던 거대한 보호막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사회복무요원 입대 예정이고, 대학교에서도 축구를 하지 않아도 남자아이들과 친구로서 사귀기에 불편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어휴, 아득했다. 비가 땅에 내리꽂듯 내 머릿속으로 치달은 순간, 그렇게 기쁘고 절로 마음이 평안했던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비를 멍하니 내다보며 구경하는 건 좋다. 그때의 트라우마는 아직 남아있고, 트라우마를 씻겨줄 나의 비는 더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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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델데이2021 벡델 에세이 공모전 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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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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