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여성의 오르가즘에 대하여

<감정에서 절정으로>

장윤주|영화감독 / 2019-12-16


<감정에서 절정으로>(The Feels)  
제니 라마르크|2017|코미디|미국|87분
<감정에서 절정으로> 포스터
어느 날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발견한 <감정에서 절정으로>(The Feels, 제니 라마르크, 2017). 제일 먼저 눈을 잡아끈 것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존 추, 2018)의 레이첼, 콘스탄스 우가 출연한다는 것이었다. ‘콘스탄스 우가 레즈비언 영화에 출연했다고?’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소개 글을 읽었다. ‘결혼을 앞둔 레즈비언 커플, 처녀파티, 폭탄 발언, 오르가즘을 못 느껴봤다, 충격,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가 키워드였다. 직설적인 소개 글과 엇박자를 이루는 제목이었지만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영화는 앤디(콘스탄스 우)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그는 첫 오르가즘에 대해, 파트너인 루(안젤라 트림버)와의 섹스가 얼마나 좋은지 행복하고 흥분된 얼굴로 말한다. 이후 앤디와 루가 조깅을 함께하고 난 뒤 섹스 씬이 이어진다. 차례로 절정에 다다르는 루와 앤디. 섹스 씬을 보며 눈이 떠지고 귀가 열렸다. 영화를 보는 자세와 마음이 풀렸다. 불편한 감정은 없었다. 전시된 남의 침실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 전 파티를 위해 (우버 택시를 불러야 하는) 아름다운 시골 산장에 모인 앤디와 루 그리고 친구들. 조쉬(조쉬 파뎀), 레귤러 헬렌(에버 메이나드), 비비안(로렌 파크스), 카린(카린 타토얀) 그리고 루의 언니 니키(제니 라마르크). 루의 친구는 레귤러 헬렌 한 명뿐이고 루는 언니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니키는 남편과 심각한 문자를 주고받으며 파티에 늦게 합류한다. 이들은 파티를 준비하고 함께 식사한 뒤 바에 간다. 바에서 루는 취한 상태로 질문을 던진다. ‘이게 그 느낌인가…?’ 그리고 자신은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헌데 앤디가 영화 도입부에서 인터뷰하지 않았던가? 루와의 섹스만 한 것은 없다고. 멀티플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그렇다면 루는 오르가즘을 연기한 것인가?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에 두 사람이 마주친, 갑자기 터져 나온 진실. 루는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다. 둘은 이 사실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서약을 앞두고. 영화는 마치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이것저것 함께 시도해 보며 결과에 놀라고 기뻐하는, 친밀하고 천천히 진행되는 섹스처럼 절정으로 치달아 올라가 불꽃을 쏘아 올리면서도 정답을 내놓지 않는다.



떠들썩했던 파티 후 왠지 싸한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촌철살인의 대사와 상황들. 웃어도 되나 싶을 때 곧바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대사가 믿을 수 없도록 생생히 살아 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그 상황에서 막 튀어나온 듯하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감독은 씬마다 어떤 등장인물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와 장면별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만 던져주고 배우들이 즉흥연기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마스터 씬을 먼저 찍고 난 뒤 세부적으로 촬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롱테이크가 많고 편집 분량도 많았다고. 감독이자 각본을 쓴 제니 라마르크와 공동작가 로렌 파크스가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영화 안에 들어가 시작과 끝을 함께 쓰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은 멕시코계 미국인으로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랐으며 2013년에 <더 프리티 원>으로 장편 데뷔를 했다. <감정에서 절정으로>는 감독과 작가뿐 아니라 배우의 80%, 그리고 촬영·편집·프로덕션 디자인 등을 맡은 스태프의 68%가 여성이다. 이 영화의 펀딩을 위해 감독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영화는 여성의 오르가즘에 대한 즉흥 코미디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여성의 오르가즘은 대체로 터부이고, 거의 토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섹스에 대해 허세를 부리자 여자 주인공이 오르가즘을 실감나게 연기해 보이는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브 라이너, 1989) 이후 20년이 지났던가? <감정에서 절정으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오르가즘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를 인터뷰한다. 이 역시 즉흥 연기와 주어진 아웃라인을 섞어서. 실제로 감독의 친한 친구였고 제일 먼저 영화에 합류한 카린, 니키와 비비안, 조쉬와 레귤러 헬렌, 앤디와 루. 이들은 섹스와 오르가즘에 대해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다. 시작과 과정, 고통과 환희, 어색함과 기이함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혹은 유머를 듬뿍 담아.


영화는 오르가즘과 섹스를 다루면서 그 기본이 되는, 관계의 크고 작은 소통을 세심하게 드러낸다. 이들의 대화는 영화를 통틀어서 친구 간의, 언니와 동생 간의, 서로 모르는 사이 간의 문제를 드러내고 풀어나가며 질문하고 답을 찾아간다. 곤란에 빠진 앤디와 대화를 나누는 건 친구들이다. 도망치고 싶어하는 루와 속내를 털어놓으며 공감을 나누는 것은 친구와 언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아는 것과 소통의 핵심을 영화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놀라웠다.

앤디는 중국계 미국인, 루는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특히 앤디는 할 말 다하는, 당당하고 섹시한 캐릭터다. 근래 들어 넷플릭스와 할리우드 영화들의 아시안 배우들과 캐릭터들이 예전보다 많이 등장하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반가운 캐릭터를 만났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레이첼도 멋졌지만 <감정에서 절정으로>의 앤디는 특히 콘스탄스 우라는 배우의 선택과 존재가 빛난다.

그리고 레귤러 헬렌 역의 에버 메이나드! 이 배우는 레귤러 헬렌 역으로 LGBTQ 영화제 중 손꼽히는 미국 아웃페스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감독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인터뷰했다. 로튼 토마토를 보니 이런 리뷰가 쓰여 있다. “(…)게이 해피엔딩.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혁명적이다.” 그저 흔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영화인데도 그렇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보러 학교를 빠져나가 종로 서울극장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었다. 안방에서 내 이야기이자 내 친구의 이야기와 같은, 여성의 오르가즘에 대한 진한 수다를 듣는 것, 반갑고 기쁘다. 이렇게 자유롭고 사려 깊게 동성애와 이성애를 아우르는 섹스와 여성의 오르가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유할 수 있는 코미디 영화를 우리나라에서도 만든다면. 그리고 극장과 안방에서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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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크로스 유어 핑거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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