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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죽음과 내상의 시정(詩情)

린 램지의 영화 세계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0-01-09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동시대 여성 감독 가운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한 사람, 영국의 여성 감독 린 램지다. 영화 학교 졸업 작품인 단편 <작은 죽음들>(1995), 칸국제영화제 단편 부문 대상작인 <가스맨>(1997) 등을 통해 이미 린 램지는 등장과 동시에 무서운 신예로 주목받았다. 이후 장편 <쥐잡이>(1999), <모번 켈러의 여행>(2002), <케빈에 대하여>(2011),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 등을 내놓을 때마다 그는 일관된 영화적 관심사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작품마다 변주를 거듭 시도했다. 

린 램지의 계속되는 영화적 테마라고 한다면, 죽음이라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 이후 개인의 내면에 생긴 상흔이나 내적 상태일 것이다. 죽음 충동에의 관심은 일상의 한순간을 잡아내 심리적 상태를 이미지화하는 데 탁월한 그의 감각과 만나면서 한층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된다. 린 램지의 영화를 시적 리얼리즘의 계보 안에서 읽으려는 시도나 시정(詩情)의 영화라고 칭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쥐잡이> 포스터

린 램지의 단편 작업의 집약이라 할 수 있는 <쥐잡이>는 그의 영화 세계를 말할 때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1970년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이 배경인데 이는 초기작에서부터 공통된다. 구체적인 시대야 작품마다 다르지만, 감독의 실제 고향이자 성장 배경이기도 했을 스코틀랜드 노동 계급 내 가족 풍경은 그의 영화의 비극성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가족, 외부에서 봤을 때는 큰 문제 없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무능력하거나 폭력적인 아버지, 가족을 돌보며 피곤함에 지친 어머니가 있는 집. 그런 가족의 그늘 아래서 자라는 소녀와 소년들. <쥐잡이>는 10대 소년 제임스 길레스피(윌리엄 이디)의 참혹한 시련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앞서 린 램지의 영화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때 죽음이라는 사건은 영화가 시작됐을 때 이미 벌어져 있거나 영화 초반부에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린 램지는 죽음을 사건화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에게는 사건 이후가 중요하다. 

<쥐잡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 라이언은 동네 운하에서 친구 제임스와 장난을 치다가 제임스의 실수로 그만 익사한다. 영화는 제임스의 죄를 묻는다거나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는 시도 없이 그날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모든 걸 떠안고 있는 제임스의 일상을 보여준다. 지극히 평범했던 동네와 그곳의 운하는 이제 제임스에게 죽음을 집어삼키고 비밀을 품고 있는 두려움의 공간,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외포의 대상이 돼버렸다. 제임스는 요지부동인 물속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그때 소년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개인의 내면과 내상을 이미지화할 때 린 램지에게 물은 중요한 장치가 돼준다. 폭력적인 또래 소년들에게 시달리던 제임스는 자신과 유일하게 교감을 나눴던 소녀 마거릿의 안경을 찾기 위해 운하의 물 앞에 선다. 버젓이 보이는 마거릿의 안경을 두고도 머뭇거리며 어떻게든 안경을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물은 제임스에게 잃어버린 것과의 대면이자 또다시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며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제임스의 죽음마저 암시하는 듯하다. 이때의 물은 생명의 활기나 유동하는 물질이 아니라 익사와 수장(水葬, 예컨대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종착지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토마토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가득 메운 그 흥건한 토마토즙의 이미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에로틱한 쾌락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피의 바다나 지옥 불 같기도 한 것이다. 

린 램지 세계에서 물은 죽음을 봉인한 일종의 ‘패킹’(packing) 상태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패킹의 이미지는 조금씩 변주돼 그의 영화 곳곳에 들어와 있다. 예컨대 <쥐잡이>의 첫 장면에서 라이언은 장난으로 창문 커튼에 얼굴을 묻고 커튼을 빙빙 돌려 제 얼굴을 패킹하는 놀이를 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이라크 파병 이후 청부살인업자로 살아가던 주인공 조(호아킨 피닉스)가 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제 숨을 막으려 드는 유사 자살행위도 마찬가지다. 린 램지는 자학에 가까운 죽음 충동 혹은 죽음의 전조처럼 보이는 장면에 매혹된 듯하다. 동시에 그는 비극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흥겹고 아름다운 음악을 사용하며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컷

<쥐잡이>에서 제임스의 엄마가 아이들과 아주 잠깐의 파티를 즐길 때, <모번 켈러의 여행>의 모번 켈러(사만다 모튼)가 자살한 애인의 시체를 처리할 때 생뚱맞기 짝이 없는 음악이 대표적이다. 그 덕분에 이들의 파티는 일상을 벗어나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듯하고, 모번의 시체 처리는 그만을 위한 흥겨운 카니발로 보인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가 엄마를 죽인 살인자와 모종의 감정을 느끼는 장면에서 음악은 서정과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린 램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인물의 심상을 짐작하게 하는 이미지로 단숨에 전환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제임스가 피곤함에 지쳐 잠든 엄마의 구멍 난 스타킹과 그 사이로 나와 있는 엄마의 까칠한 발가락을 보다가 스타킹으로 엄마 발을 가만히 덮어주는 장면은 얼마나 섬세한가.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는 여자의 마음을 머릿결 한 올로 표현해낸 <가스맨>, 죽은 어머니의 머리카락 한 올이 물속에서 흐느적거릴 때 무력한 죽음마저도 이상하게 아름답게 보이던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고속촬영 장면들은 또 어떤가. 심상을 이미지로 응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크게 보면 심리 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린 램지의 영화들은 계속해 모험한다. <모번 켈러의 여행>은 여성 주인공의 과감한 모험극, 로드무비, 탈주의 영화처럼 보이고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애라는 신화를 전복하고 엄마의 내적 딜레마를 전면화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스릴러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내상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린 램지는 규칙이라고 불리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극적인 사건을 나열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견고하게 자기 스타일을 쌓아 올렸고 마음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치열한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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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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