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윤영과 성원의 일기, 메기의 기억

<메기>

윤혜은 / 2019-12-26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윤영의 일기

2020년 1월 31일 금요일

설날을 앞두고 엄마는 별안간 소주 한 컵 분량의 피를 쏟아냈다. 새벽부터 나를 깨워서는 진득하게 사우나를 즐기고 돌아온 뒤였다.

본격적으로 낮잠이나 자볼까… 나는 극세사 담요가 깔린 거실 마룻바닥에 누워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낮은 천장 한 번, 가죽이 다 벗겨진 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의 맨발 한 번, 소파 옆으로 늘어선 다육이 무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대로 서울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흰 발은 거칠고 주름진 손과 달리 뚜렷한 나이테가 느껴지지 않아 좀 신기했다. 손을 뻗어 발을 매만지려는 찰나 엄마가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엄마의 발이 내 손을 치고, 그 손이 다시 내 턱을 쳐버리는 바람에 나는 혀를 깨물고 말았다.

아 씨, 진짜!

엄마는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엄마의 작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변기 물이 빨갛게 번져갔다. 119를 부르는 내 기척에 엄마는 한 손을 뒤로 뻗어 저리 가라는 듯 휘휘 젓다 이내 다시 변기를 부여잡았다. 엄마의 등에는 사우나의 뜨끈한 온기가 남아 있었고, 셔츠의 목 언저리는 덜 마른 머리칼로 살짝 젖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생생한 온도로 살아 있는 엄마가 당장이라도 내 앞에서 쓰러져 죽을까 봐 겁이 났다. 엄마보다 더 많은 양의 피를, 온몸으로 토하는 환자를 마주한 적이 허다한데도. 은은한 샴푸 향기를 풍기면서, 작은 등을 둥그렇게 만 채로, 얌전히 울컥울컥 피를 뱉어내는 엄마의 모습이 제일 섬뜩하게 기억될 것만 같아 무섭다.


2020년 11월 6일 금요일

그날, 엄마는 살았고 나는 두 계절을 더 마리아 사랑병원에서 마저 보내고 이직을 했다. 본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마침 호흡기내과에 티오가 났더랬다. 계약직이긴 하지만, 부원장님의 귀띔이 아니었다면 채용 소식조차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와 다시 함께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 사이 엄마의 피 섞인 가래에서는 비결핵 항산균이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난치병이나 다름없는 진단이라 약을 오래 먹어야 한단다. 읍내에 있는 종합병원에서는 엄마의 폐가 워낙 약해서 죽을 때까지 먹을 수도 있다고 겁을 줬다. 죽지 않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게 좀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균을 죽이는 역할을 빼면 신체 어디에도 이로울 것이라고는 1도 없는 독한 약이기 때문에, 의사는 일단 몸을 먼저 만드시라고 엄마를 돌려보냈다. 봄과 여름 내내 가벼운 등산을 하면서 엄마는 내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산 중턱에서 숨을 고르다 보면 말이야. 이대로 몸을 던져 죽으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

엄마는 겨우 그런 말들을 했다. 그리고 나를 너무 잘 아는 엄마는 다시 제 말투로 덧붙였다.

 “그러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런 적도 있다고. 너 또 울면 엄마 이제 너한테 아무 말도 못 해.”

나는 혼자 등산하는 엄마를 떠올리는 것보다 내 앞에서마저 입을 다무는 엄마가 더 무서워서 그랬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은 체를 했다.

나의 이직 후, 반 묶음 머리가 잘 어울리는 정 선생님이 엄마의 새 주치의가 되었다.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엄마는 정 선생님을 마음에 들어 했다. 첫 진료 후 엄마는 너도 저렇게 머리를 길러 보라고, 간호복에 잘 어울리는 헤어핀을 사줄 테니 길어서 뒷머리에 달아보라고 말했다. 간호복에 잘 어울리는 헤어핀이라는 게 있을까. 하지만 엄마라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그런 걸 기가 막히게 찾아올 것이다. 기어이 내 뒤통수에 핀 하나를 꽂아버릴 엄마를 안다. 엄마가 나를 생각하며 무언가 시도할 때에, 그녀가 해내지 못한 것은 거의 없었으니까.

오늘은 이직 후 한 달째 되는 날. 엄마는 요즘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와 같이 산 뒤로 엄마의 모습은 줄곧 밝다. 가끔은 엄마가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걸까 봐 의심스럽다. 10년 만에 같이 살게 된 우리라, 서로에게 얼마큼 솔직해도 되는지 간을 보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몰라도, 엄마는 절대로 내게 그렇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냥 다, 뭐든 내 앞에서는 안심하고 행동하면 좋겠는데.


2020년 12월 21일 월요일

겨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지만, 아픈 사람들에겐 가장 위험한 계절이다.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도 그렇고 낮이 짧아 볕을 쬘 시간이 줄어들면서 우울감도 쉽게 찾아온다. 환자들에게 겨울은 마음속에 세워진 투명한 허들 같다. 올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을 수 있을까, 새해를 넘겼으니 이제 설날을, 어영부영 봄을, 새순이 돋아나는 간지러운 풍경을 병실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내게 묻는다. 간호사님,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나는 언제나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한다. 그럼요.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건 엄마뿐이다. 호흡기내과 병동에는 엄마보다 중증인 환자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집에서 더덕차를 우리고 있을 엄마야말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윤영의 말, 메기의 기억

날짜 없음

윤영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믿어. 사람은 믿는데, 병은 믿을 수가 없어서 괴로워. 병을 믿어서는 안 되니까. 믿어선 안 되는 것과 상대하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거였어.”

믿어야 할 것이 없는 나는 이해가 잘 안 됐다. 믿음도, 믿지 않음도 없는 삶이어서 윤영에게 괜히 미안했다. 아주 가끔, 윤영은 나를 쓸쓸하게 쳐다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윤영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걸 나는 이제 알 수가 있다.

날짜 없음

윤영은 지금 내 어항이 놓인 협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댄 걸 보니 통화 중인 모양이다. 시야 가득 윤영의 뒤통수가 들어온다. 뭔가 번쩍이는 것이 달려 있다. 눈이 부셔서 어항을 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좀처럼 서두르게 움직이는 법이 없는 터라 윤영이 내 기척을 느끼고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런데 두 눈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꼬리를 가만히 움직이며 윤영과 눈을 맞춘다.

윤영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자기 인생이 이쪽에서 성실히 싱크홀을 메워도 저쪽으로 가다가 싱크홀에 빠져버리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게 다 너 때문이라고.” 다행히 이 말을 뱉으면서 윤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제자리에서 뻐끔,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윤영에게 믿지 못할 일이 또 생긴 것 같다.


성원의 일기

2021년 4월 15일 목요일

어제는 아침부터 새로 생긴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셨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병원에서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최소 오십 명 이상의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고 마는 이곳이 어떤 게임 속 광장 같기도 하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영상의학과로 호흡기내과로 체혈실로 각자의 맵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엄마를 따라간다. 종종 길을 헤매는 이는 있어도 길을 잃는 이는 없어 보인다. 저마다 당도해야 하는 목적지가, 클리어해야 하는 미션이 뚜렷하니까.

예약이 무색한 기다림 끝에 CT촬영과 의사 접견을 마쳤다. 엄마는 이제야 좀 안심이라는 듯 편한 얼굴로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나는 엄마가 조영제 주사를 맞기 전에, 촬영실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한 번 잡아줄걸, 때늦은 생각들을 하며 수납을 대신할 뿐이다. 다음 접속 때는 내가 그것을 잊지 않도록 오늘을 잘 세이브 해둬야지.

마리아 사랑병원에서는 언제나 윤영이 나를 대신해 엄마를 돌봐줬던 게 생각나 잠깐 걔를 떠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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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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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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