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시적으로 흐르는 세 개의 이야기

<어떤 여자들>

장윤주|영화감독 / 2019-12-26


<어떤 여자들>(Certain Women) 
켈리 레이차트|2016|드라마|미국|102분

<어떤 여자들> 스틸컷 ©다음

넓게 펼쳐진 눈 덮인 산과 구름 낀 하늘,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차의 불빛. 기차 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와 미국 서부 몬태나 주 마을의 전경. 기차 소리는 계속해서 멀어지지만 사람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고 그곳에서 풍광에 함께 녹아 움직인다. 그들의 마음은 풍경으로, 소리로, 눈빛으로 그리고 말 없는 움직임으로 전해진다.

<어떤 여자들>(켈리 레이차트, 2016)은 세 개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묶여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단편영화로 따로 보아도 될 만큼 완결성이 있으면서 서로 연결되어 흘러간다.

첫 번째 이야기. 여자와 남자가 양말을 신고 내복을 입고 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에서 옷을 입고 그 모습은 한 프레임에 잡힌다. 방금 애인과 섹스를 마친 로라(로라 던)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사무실로 돌아가자 고객인 풀러(자레드 해리스)가 그녀를 기다린다. 풀러는 로라를 찾아와서는 끈질기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녀 역시 열심히 듣고 있지는 않다. 사고로 직업을 잃은 풀러는 보상금을 받기를 원하고 로라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리빙스턴에 거주하는 변호사로인 로라는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객 때문에 지쳐 있다). 그러다 나이 많은 남자 변호사가 합의가 이미 되어 보상금을 더 받을 수 없다고 못 박자 풀러는 단번에 수긍한다. 로라는 애인과 전화 통화 중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남자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로라는 길에서 소리지르는 풀러를 보게 되고 애인은 전화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갑자기 풀러가 로라의 차에 올라 탄다. 로라와 애인의 대화는 끊기고 만다.

<어떤 여자들> 스틸컷 ©다음

두 번째 이야기. 지나(미쉘 윌리엄스)의 남편은 전 이야기에서 로라와 섹스를 하고 옷을 갈아입던 바로 그 남자다. 지나는 남편과 딸이 함께 웃는 농담에 웃지 않는다. 지나는 계속해서 남편과 딸과 대화가 엇갈린다. 딸은 퉁명스럽고 지나는 남편이 자신을 나쁜 엄마로 만든다고 비난한다. 목소리는 높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는 오래 묵은 긴장이 가득하다. 지나가 원하는 것은 시골에 집을 짓는 것. 그러기 위해 한 노인의 집에 쌓여 있는 사암 돌무더기를 얻고 싶어 한다. 계속해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무너지지 않기 위해 늘 바짝 묶은 헤어스타일처럼 긴장한 그녀의 몸이 풀리는 듯할 때는 단 한 번, 노인의 집 근처에서 새소리를 듣는 순간이다.

세 번째 이야기. 영화 내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 목장관리인(릴리 글래드스톤)은 겨울 동안 목장에서 말을 돌본다. 그녀는 라디오와 TV 소리만이 유일한 벗인 그곳에서 말들에게 먹이를 주고, 목장의 여기저기를 돌보다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이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동네 학교의 법률 강의실에 들어간 그는 강의를 하러온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만난다. 베스의 어색한 첫 강의가 끝나고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다. 베스는 신참 변호사로 법대 학자금을 갚기 위해 강의를 맡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먼 곳인지도 모르고 강의를 하게 됐다는 그는 포크에 묶여 있는 냅킨을 풀지도 않은 채 입을 닦는다. 베스의 이야기를 듣는 목장관리인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미소가 스친다. 베스는 목장을 보여 주겠다는 목장관리인의 말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건성으로 대꾸한다. 다시 베스와 함께 식당을 찾은 목장관리인. 이번에는 그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다. 베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는 법대를 졸업한 뒤 신발장사를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고 대답한다. 목장관리인은 어느 날 저녁 베스에게 말을 태워 주기 위해 자신의 말을 타고 그에게로 향한다. 

<어떤 여자들> 스틸컷 ©다음

세 번째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마치 차가운 공기가 만져질 듯한 눈 덮인 목장의 풍광. 김을 뿜어내는 말들. 그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목장관리인의 몸과 그의 움직임.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가 돌보는 말을 태워 주고 싶은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의 눈빛. 베스가 보고 싶어 밤새 차를 타고 달리는 그의 얼굴, 그 것들은 기어이 나의 마음을 흔들고야 만다. 굳이 말로써 표현하지 않아도 오롯이 전달된다.

세 개의 이야기를 통해 흐르는 외로운 사람들의 엇갈리는 혼잣말 같은 대화들과 그럼에도 서로를 스치는 유머와 따뜻함의 찰나 같은 것들. 떠도는 마음을 부여잡는 이들의 눈빛을 오래 보여주는 시선. 함께 있을 때도 혼자 인 것만 같은 그때를 담담히 보여주는 힘과 그것이 주는 위로.

영화는 로라와 그의 애인이 어떻게 됐는지, 지나와 남편은 화해를 했는지, 목장관리인은 잘 지내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어찌하고 있는지도. 그저 그들의 표정, 쌓여 있는 돌무더기, 새소리 그리고 목장의 라디오 소리만이 깔릴 뿐이다.

<어떤 여자들> 스틸컷 ©다음

그렇지만 알 수 있다. 그 작은 동네에서 여자들은 마음 한 켠을 다른 이에게 내어 준 덕에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란 걸. 자기처럼 외로운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걸. 자신의 마음에 화답을 받았건 받지 않았건, 자기들이 원하는 것에 반응했고 그것을 위해 몸을 움직였기에 계속 살아지는 어떤 것을 그들은 가지고 있기에. 목장관리인이며, 말이 없고 묵묵히 일만 하는 어떤 여자가 있다. 그가 어떤 여자를 위해 자신이 돌보는 말을 태워 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 세상에 다시 없는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 이 영화는 아름답다. 그 산 속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이 내 마음인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여자들>에는 많은 동물이 나온다. 동물과 사람의 유대가 사람 사이의 그것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로라가 발로 애인의 어깨를 만질 때보다 혼자 TV를 보며 반려견의 몸을 발로 만질 때 그녀가 내쉬는 숨이 더 만족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로라가 개와 함께 사무실의 계단을 총총 올라갈 때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지나는 새소리를 들으며 혼자 담배를 피울 때 비로소 미소를 짓는다. 목장관리인이 목장에서 말의 털을 빗기며 말을 돌볼 때, 말과 사람의 소리 없는 유대는 마술의 전조와도 같다.

켈리 레이차트는 이 영화의 풍광을, 특히 눈의 질감을 담아내기 위해 16mm 카메라를 사용했다. 목장관리인이 하얀 눈길을 트랙터로 달리고 그 뒤를 개가 짖으며 뒤따르는 장면이 따뜻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로라 던, 미쉘 윌리엄스,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리고 릴리 글래드스톤의 연기는 물 흐르듯 하고 때로는 기막히게 코믹한 타이밍과 멈춤, 머뭇거림과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시적으로 흐르는 세 개의 이야기는 막힘 없이 자연스럽다. 그렇게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는 조용히 힘있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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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크로스 유어 핑거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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